2017년 6월 29일 목요일

2017년 6월 29일

2017년 6월 29일

퇴직원을 책상에 둔 채로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PC자산반납신청을 하고, 박스를 가져와 포장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속에 분노라든지, 8년간의 회사생활을 접는다는 슬픔은 없었다.
아마도 휴직계를 내면서 이미 돌아오지 않을거라는 생각을 했기에
나에게는 퇴사가 조금 앞당겨진 것 뿐이었다.

뀰에게는 달랐을까?
뀰은 면담 한번 해보지 못하고 나의 여자친구기때문에 결혼상대자이기 때문에
휴직 반려가 결정되었다.
나는 원래 별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부당하다고 느껴지지만, 결과가 동일하다면 그냥 대수롭지
않게 받아드리고 넘어간다.

하지만 뀰은? 나에게 묶여서 덤으로 취급당하고 반려까지 당한 뀰의 생각은 어땠을까.


허수석님과 출하의 미래들과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길에 뀰에게서 연락이 왔다.
식사가 마치면 회사앞 까페로 잠깐 올 수 있냐고 물었다.
왜냐고 물으니 미공감의 위원과 함께 얘기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최근 선출된 미공감의 위원은 원래 뀰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가는길에 의문이 들었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늘 욕하는 미공감의,
위원이 뭘 할 수있을까?

까페에 가니 이미 뀰과의 얘기는 마치고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모양새였다.
미공감의 위원의 얘기는 이랬다.
나하고 묶어서 반려당한 처세는 너무하다. 부적절하다. = 동감
전사까지 가지도 않고 사업부 차원에서 겁먹고 반려한거같다. = 동감

위원으로 본인이 이의를 제기한다고 했다.
그리고 하니는 여행갔다와서 다시한번 휴직계를 제출하는게 이야기의 골자였다.
난 부정적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돌아올 생각도 없는데.
하지만 뀰은 달랐다. 부당하고 어이없는 회사의 처우에 한번 반기를 들어볼 생각이었다.
뀰이 그렇게 한다면 나는 큰 이의가 없었다. 게다가 미공감에서 도움을 준다면야...

회사에서 짐을 정리하고 나서는데, 김재선배가 배웅을 해줬다.
김재선배, 첫 맏선배. 배울점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했고 '그런것'을 닮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것' 들은 내 것이 아니었다. 닮으려 해도 닮을수 없는 것들이었다.

게이트를 나서서, 앞에서 인사를 하는 데 김재선배의 얼굴과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렇게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나?

당황스럽지만 고마운 감정. 나도 울컥하는 느낌이 올라왔다.
문득, 지도선배 할 때의 감정이 밀려왔다.

사실 후배들과 헤어지는게 슬프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단상에 서서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하는데 뭔가 밀려오는게 있었다.
먹먹한 감정들.

나는 회사를 떠나는데 있어서 나는 슬프지않았다. 헤어진다는 느낌이 들지않았다.
언제가는 만나지않을까 하는 생각들.

만나지 않더라도 요즘 같은 세상에 내가 벗어난다 하더라도 그게 끝일까하는 생각.
또는 내가 원래 정이 없거나...





2017년 6월 28일 수요일

2017년 6월 28일. 퇴사권유

원래 퇴사를 할 생각이었다. 휴직계를 내고 2년후 캐나다에서 자리를 잡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퇴사를 하려고 했다.

처음 회사에 대학원 합격을 했고, 휴직계를 내겠다고 PMO 수석에게 말한게 5월말. 그리고 일주일후 실제로 휴직계를 제출했다. 
휴직계를 내고 며칠후, PMO수석에게 전화를 받았다. 대학원을 포기할 수 있겠냐고, 이년후 돌아오겠냐고 물어봐서 속으로는 뭔 개소리지 싶었지만, 대학원은 포기할 수 없다, 그리고 이년뒤 돌아올 생각이다라고 말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서 오늘 6월 28일에 이르러 사업부 인사과 차장에게 전화가 온다. 휴직계가 반려되었단다. 
물론 그전에 PMO 수석에게 미리 휴직이 어려울수도 있겠다는 언질을 들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만은 기분이 더러운건 어쩔서 없다.  사유가 뭐냐고 물으니 인력이 부족한데 휴직은 해줄수 없다고 한다. 역시나 개소리.
내 진학휴직만 반려되었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뀰의 어학휴직도 반려되었다고 한다. 

문득 어제 조팀장님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 너희가 패를 너무 다 보여줬다'

순진했다. 회사에 제도가 있고 자격이 되면 당연히 이용할 수 있을줄 알았다. 
회사를 하나의 인격이 있고, 인정이 있는 생물처럼 착각을 했다.

회사는 가장 효율적으로 돈을 벌고 아낄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냥 나는 회사에 더이상 효율적인 자원이 아니었을뿐인 것.

그렇게 퇴사가 결정되었다.

2017년 3월 15일 수요일

군대

기록삼아 남겨보는 군대이야기 1

나는 공군을 갔다왔다. 대학교1학년즈음 어딜갈지 고민하기 시작해서, 휴가가 많고 상대적으로 편하다는 이유로 공군을 선택했다. 기억력이 좋은편이 아니라서 지나온 삶의 많은 부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다른 것들에 비해 군대에서의 생활은 기억이 나는 부분이 많은편이다. 훈련소의 시작부터.
진주에 있었던 훈련소에 도착하고, 아버지의 눈물, 엄마의 눈물.(아버지의 빨간 눈시울은 그전에도 본 적이 잇지만 나를 위한 붉어진 눈시울은 인상적이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시작된 조교의 욕설. 천막밑에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조교의 욕설을 들으며, 했던 생각들. 그리고 첫날밤.

훈련은 고되었다. 별 생각없이 선택한 여름의 더위와 고된훈련은 내 입맛을 뺐었고 덕분에 살을 꽤나 뺄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기억나는 단편적인 기억은 많지만, 기록을 남길만한 일은 없는 그런 나날들.
그 중 기억나는 동기는 준우, 박준우 였지? 나보다 나이는 많지만 죽이 잘 맞았던 군대동기. 소유진의 친척이고 일본어를 잘했던 동기. 계속 연락하자고 지내자고 했는데 결국은 연락을 하지않았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내 인생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물론 내 노력도 그런 운을 만드는데 보탬이 되었겠지만.
공군의 장점은 대도시에 공군기지가 있다는것이다. 훈련생들은 각자의 연고에 있는 공군기지를 가고 싶어했다. 가장 경쟁률이 높았던 곳은 아마 서울경기권이겠지만 대구도 만만치않았던걸로 기억난다. 공군만 그랬던건지는 모르겠지만 공군은 특기를 뽑고 그 특기에 대한 공부를 시킨다. 그리고 시험을 쳐서 성적순으로 각자의 지망에 따라 배치를 했다. 나는 당연히 대구에 있는 11비행단을 지원을 했나? 모르겠지만 운이 좋게도 11비행단에 있는 공군군수사령부로 배정받게 되었다. 군수사는 11비안에 있긴 하지만 비행단과는 다른 별도의 조직이었다. 공군전체의 보급품을 다루는 곳으로 총기만 빼고는 모든 물자가 있었다. 운이 좋았던것이겠지?

훈련소만 마치면 끝일것 같았던 군대생활도 자대를 배치받으면서 진정으로 시작이 되었다. 2주 빨리 훈련소을 나간다고 으시대던, 훈련소만 나가면 군대생활끝인거 처럼 굴던 사람들. 나도 그중에 하나였고 내 밑에 군번들보면서 으시대던것들이 다 우스운것이었다.
자대배치첫날, 각 내무반의 반장(?)들이 각자의 신병을 데려가던 그날의 기억. 난 마지막으로 뽑혔던거 같다. 뚱뚱했기에 자존감이 없었던 내가 그렇게 기억을 왜곡한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환영받지는 못했던거 같다. 나말고 다른동기들이 다 뛰어났기에. 영민이, 성화, 주완이.

 군대란, 참 이상한곳이었다. 자기들만의 룰을 만들고 자유를 억압하는게 당연하다고 여겨지며 궁금한것에 대해 질문을 하는것조차 개념없다고 여겨지는곳. 그 집단에 속해있으면서 그런것들에 대해 당연하게 여기고 나도 어느새 내 후배들에게 강요하게 되는곳. 그리고 거기서 배운것들을 군대이후에도 당연하다는듯이 적용하게 되는것. 회사에 있으면서 선배가 어떤 물건이든 들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제가 들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자신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사회의 상명하복의 병폐도 다 군대의 연장선이겠지.

 신병의 자리는 내무반에서 제일 문에서 가깝고 TV에서는 제일 먼 자리였다. 문을 기점으로 양면에 침상들이 있고 가운데 통로는 복도와 연결된 통로. 그 침상에 허리는 꼿꼿이 손은 주먹을쥐고 무릅에 각잡고 앉아있으면서 졸지도 말아야되며 TV를 보려고 고개를 돌려도 안되며, 티비소리에 웃어도 안되고 그냥 멍을 때려도 안되는게 신병의 자세였다. 몇시간이고 아무일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는게 얼마나 힘든지... 그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졸려하는 모습이 보이면 '빠졌네' 라는 선임들의 얘기가 들리고 낙인이 찍히는것이다.

기억나는 상황1. 내무반을 배치받고 나면 인적상황을 기재해야한다. 당시 각 내무반에는 행정을 담당하는 사병이 존재했는데 상병의 일정시기가 되면 그 일을 맡고 몇개월간 했어야됐었다. 내가 신병일때의 행정병은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사마귀를 닮은 모상병. 인적사항을 기재하다가 뭐라고 적을지 몰라서 질문했더니 어이없다는식으로 빤히 노려본 기억이 난다. 질무나는것자체가 버릇이 없단다.

 나는 보급병이었다. 우리는 보급병이었다. 군수사였으니.
군수사령부에는 각 물자별로 창고를 나눠어놓고 창고를 1B, 2B 라고 호칭하였다. 나는 그중에서도 힘들다고 소문난 2B에 배치되었다. 2B가 힘든이유는 다른게 아니라 전투화, 전투복, 비누등등의 일반물자를 담당하였고 한번에 들어오는 물자의 양이 엄청났다. 한번 물자가 들어오면 갯수로 적게는 몇천에서 몇만개가 들어왔으며, 물건을 놓을자리를 창고내에서 확보하고(이미 많이 불출된 물건을 다시 최대한 높게쌓아 빈공간을 만들었다) 새로운 들어온 물자를 키 높이의 3-4배의 높이로 쌓는다. 이 과정이 완전 노가다이다. 일을 도와주시는 인부분들과 일을 나누어하긴했지만.
 처음 내게 배정된 창고는 2B창고가 아니었다. 외곽지역에 있는 다른 창고였다. 신병을 테스트해본다고 나와 주완이가 그 창고에 인사하러갔는데 그 때 당시는 몰랐지만 창고주임과 선임들은 나를 점찍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주완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덩치가 컷기에. 하지만 그 판단은 족구 한게임에 완전히 바뀌었다. 주완이는 지금 생각해도 참 열정적인 동기였다. 그게 일이든 운동이든. 빠릿빠릿하고 몸을 아끼지않았다. 나라도 그랬을것이다. 나와 주완이라면 당연히 주완이.
 뭐 과정이야 어쨌든 2B에서의 생활은 나쁘지않았다고 본다. 2B의 선임들은 배울점이 많았다. 인간적으로든 업무적으로든. 한명 빼고.
 지금은 다들 이름이 기억나지않는다. 최성인병장은 창고에서 바로 내 맏고참이었고 내가 개인적으로 존경하기에 기억이 남지만.